金科玉條금과옥조

《백서노자을본(帛書老子乙本)》
知不知尙矣, 不知知病矣. 지불지상의 하며 불지지병의 니라.
아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높은 것이며,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것은 병이다.


홍매(1123-1202)《용재속필》--- 소하가 한신을 속이다(蕭何紿韓信)
信之為大將軍,實蕭何所薦。今其死也,又出其謀。故俚語有『成也蕭何,敗也蕭何』之語。
한신이 대장군이 된 것은 소하의 추천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 또한 소하의 모략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속어(민간)에서 『한신을 만든 사람도 소하요, 한신을 패망시킨 것도 소하다.』라는 말이 있게 되었다.


사마광(1019-1086)《온국문사마정공문집》(사마광의 문집)
  新進後生, 未知臧否, 口傳耳剽,翕然成風. 至有讀《易》未識『卦』『爻』, 巳謂<十翼>非孔子之言. 讀《禮》未知篇數, 巳謂<周官>爲戰國之書. 讀《詩》未盡<周南><召南>, 巳謂毛․鄭爲章句之學. 讀《春秋》未知十二公, 巳謂《三傳》可束之髙閣. 循守注疏者, 謂之腐儒, 穿鑿臆說者, 謂之精義.
신진후생들은 옳고 그름을 알지 못하고, 구전(소문)만 듣고서 따라함이 하나의 풍조를 이루었다.
《주역》을 읽고도 『괘』와 『효』를 구분하지 못하면서 <십익>은 공자의 말이 아니라고 한다.
《예》를 읽고도 그 편수도 모르면서 <주관>은 전국시대에 지은 책이라 한다.
《시경》을 읽고도 <주남>과 <소남>도 모르면서 모시와 정현의 주는 장구지학이라고 한다.
《춘추》를 읽고도 12공도 모르면서 <삼전>은 모두 묶어서 고각에나 보존시켜야 할 책이라고 한다.
주소자(고증가)들을 썩은 유학자라 하고, 천착(이치에 맞지 않는 말)하고 억측하는 사람들을 정의라고 일컫는다.


양계초(1873-1929)《중국근삼백년학술사》
無論做哪門學問, 總須以別僞求真爲基本工作. 因爲所憑借的資料若屬虛僞, 則研究出來的結果當然也隨而虛僞, 研究的工作便算白費了. 中國舊學, 十有九是書本上學問, 而中國僞書又極多, 所以辨僞書爲整理舊學里頭很重要的一件事.
어떤 학문을 막론하고, 거짓을 구별하고 진리를 탐구하는 것을 기본 작업으로 삼아야 한다. 만약 허위의 자료를 이용하게 된다면, 연구결과도 당연히 허위를 따르게 되며, 연구 작업도 헛되게 된다.
중국의 옛 학문은 열에 아홉이 서적을 근간으로 하는 학문이었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위서(僞書)가 극히 많았다. 그래서 서적을 변위(辨僞;거짓을 변별하다)하는 일이 옛 학문 속에서 정리가 된 것은 매우 중요한 일대 사건이었다.

by 소하 | 2010/03/08 01:24 | 노자(老子) 도가(道家) | 트랙백 | 핑백(1) | 덧글(26)

중화서국《삼국지》출판설명1

   우리나라에서 일부 완역된 중국의 25사는 중화서국의 서적을 저본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해제에 해당하는 “출판설명”은 빠져 있습니다. 서문이나 발문 같은 것은 더더욱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비록 다른 서적에서 번역한 것이 보이지만, 중간에 빠뜨리고 번역하지 않은 부분도(표시도 없음) 보입니다. 이것들은 독자들에게 고적의 내력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여 서적의 이해도를 높여줍니다. 분량도 적당하여 체례와 서지사항을 알 수 있는 좋은 글이라고 생각됩니다.

 

중화서국《삼국지》출판설명

   위魏 문제文帝 황초黄初(서기 220-226) 원년에서 진晋 무제武帝 태강太康(서기 280-289) 원년에 이르기까지는, 중국 역사상 위魏․촉蜀․오呉 삼국이 정립했던 시기다. 이 60년의 역사 사실을 기재한 비교적 완전한 사서는, 서진西晋 초기에 진수陳壽가 저작한 《삼국지三國志》가 있다. 


   당나라 이전에는 본래 《사기史記》․《한서漢書》․《동관기東觀記》를 “삼사三史”라고 하였는데, 후대에 《동관기》[1](현재 존재하는 《동관한기東觀漢記》는 후대 사람의 집일서이다.)가 실전되자, 《사기》․《한서》․《후한서後漢書》를 “삼사”라고 하였으며, 후세 사람들은 진수陳壽의 사학과 문필을 높이 평가하여 《삼국지》를 추가하여 “사사四史”라고 불렀다. 《삼국지》는 《사기》와 《한서》의 (사학을) 계승하여 지은 것으로 《후한서》 이전에 성립되었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는 통사체이고, 반고班固의 《한서》는 단대사체인데, 《삼국지》는 삼국을 세 서적으로 나누었으니 -《위서魏書》30권, 《촉서蜀書》15권, 《오서呉書》20권으로 - 모두 65권으로, 단대사에 있어서 별도의 한 격식을 창조하였다.


   진수가 책을 완성한 연대를 비록 확정할 수는 없으나, 그가 진 혜제惠帝 원강元康 7년(서기 297년)에 죽은 것은 알고 있다. 이때는 위나라 최후의 군주인 진류왕陳留王이 아직 죽지 않았을 때이다. 당시에 위나라와 오나라 양국에는 이미 역사서가 있었는데, 관에서 수찬한 왕침王沈《위서魏書》와 위소韋昭의 《오서呉書》, 개인이 편찬한 것으로는 어환魚豢의《위략魏略》이 있었으니, 이 세 종류의 서적은 진수가 근거했던 기본적인 사료들이었다. 오직 촉나라의 역사(자료)만 없었는데 필시 진수가 직접 (역사 자료를) 채집하였을 것이다. 진수는 촉나라 사람이며, 또한 사학가 초주譙周의 제자로 촉나라가 아직 멸망하지 않았을 때 촉나라의 사실에 주의를 기울였으므로, 그가 채집한 것은 비록 위나라에 미치지 못하고, 오나라의 관찬사료처럼 풍부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결국에는 《촉서》를 완성하여 마쳤으니,《위서》와 《오서》 두 서적과 나란히 배열할 수 있었다. 다만 세 나라의 사료가 근원이 같지 않았기 때문에, 세 서적의 완성도에는 차이가 있었다. 《오서》는 본래 예전 위소의 저술에 의지하여 다시 진수의 손을 거쳐 완성되니 그 완성도가 한층 더해졌다. 《촉서》는 원본(의지할 사료)이 없었으므로 비교적 간략하다. 《위서》의 많은 부분은 위나라 역사의 옛 문장에 의거함이 많았는데, 왕침과 어환의 원서에 기재된 것으로(일례로 조상의 죄악에 관한 것), 진수는 진나라의 신하로서 감히 원문을 고치지 않았으니, 이것은 사실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평가를) 면하기는 어렵다. 총괄하여 말한다면 진수가 본 사료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세가지 서적의 내용은 모두 충실하지 못하다. 《삼국지》에는 <지志>와 <표表>가 없는 것은 바로 사료가 부족했기 때문이며, 이후에 배송지裴松之가 주석을 달면서 이러한 결점을 보완하려고 하였다.


   《위서》․《촉서》․《오서》 세 서적은 본래 각기 (독립된) 서적으로 전수되었는데, 북송 시기에 이르러 판을 새길 적에 처음으로 하나로 합쳐서 《삼국지》라고 바꾸어 불렸다. 《구당서》<경적지>에서 《위서》는 정사류에 넣었으며, 《촉서》와 《오서》는 편년류에 넣었는데, 이러한 분류법은 물론 잘못된 것으로 웃을 일이지만, 세 서적은 일찍이 송나라 이전에는 서로 독립되어 세상에 널리 퍼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지》의 최초 판각본은 북송 함평 6년(1003년)의 국자감 판각본으로 <오지呉志>가 상하 두 질로 나누어져 있으며, 앞에는 <오지呉志>의 첩문을 새겨 놓았다. 이후 소희紹煕 시기에 재차 판각한 판본 안에도 함평 연간에 국자감에서 판각한 <촉지蜀志>의 첩문 1쪽을 남겨두었다. 함평 연간에 책을 판각할 때 이미 병합되어 《삼국지》라 하였지만, 세 서적이 아직까지 별도로 나뉘어서 발행되고 판각되었음을 알 수 있다.


[1]《동관기東觀記(동관한기東觀漢記)》: 후한 시대에 후한의 역사를 서술한 서적으로,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정부에서 주관하여 편찬한 기전체 관찬정사. 동관은 서적을 보관하던 곳이었다. 정부에서 주관한 서적답게 곡필이 많아서 식견있는 사람들은 소리높여 비판하였다. 현대로 본다면 "하상주단대공정"과 비슷한 경우다. 

 

 

中華書局《三國志》出版說明

   魏文帝黄初元年到晋武帝太康元年(公元二二〇-二八○), 是中國歴史上魏․蜀․呉三國鼎立的時期. 記載這六十年歴史發展的比較完整的史書, 是西晋初年陳壽著的這部《三國志》.

   唐代以前, 本以《史記》․《漢書》․《東觀記》爲三史, 後來《東觀記》失傳(現存的《東觀漢記》是後人輯佚書), 就稱《史記》․《漢書》․《後漢書》爲三史, 後人推重陳壽的史學和文筆, 於是又加上《三國志》, 稱爲四史. 《三國志》繼承《史記》․《漢書》而作, 成書遠在《後漢書》以前. 司馬遷的《史記》是通史體, 班固的《漢書》是斷代史體, 《三國志》把三國分成三書-《魏書》三十巻, 《蜀書》十五巻, 《呉書》二十巻, 共六十五巻, 在斷代史中別創一格.

   陳壽成書的年代雖然不能確定, 但知他死在晉惠帝元康七年(公元二九七), 這時候魏的最後一個君主陳留王尚未死去. 當時魏․呉兩國已先有史, 官修的有王沈《魏書》․韋昭《呉書》, 私撰的有魚豢《魏略》, 這三種書是陳壽所根據的基本材料. 惟蜀國無史, 必須由陳壽直接採集. 陳壽是蜀人, 又是史學家譙周的弟子, 在蜀未亡時即注意蜀事, 他所採集雖然不及魏,呉官史那様豐富, 也終於完成《蜀書》, 與《魏》․《呉》兩書並列. 但正因爲三國史料的來源不同,所以三書的成就也有差異. 《呉書》因爲韋昭的舊著本來相當好, 再經陳壽整比, 更加完美. 《蜀書》没有藍本, 因而比較簡略. 《魏書》多是根據魏史舊文, 而王․魚原書的記載, 有些是秉承司馬懿意旨誣加的(例如關於曹爽的罪惡), 陳壽是晉臣, 不敢擅改原文, 這就難免有些失實的地方. 總括的説, 因爲陳壽見到的史料有限, 所似三書的内容都還不够■充實. 《三國志》没有<志>․<表>, 正是爲了材料不足; 後來裴松之所以要給它作注, 也是要補救這個缺陷.

   《魏》․《蜀》․《呉》三書本是各自爲書, 到了北宋雕板, 始合爲一種, 改稱《三國志》. 《舊唐書》<經籍志>以《魏書》入正史類, 《蜀書》․《呉書》入編年類, 這種分類法, 固然錯誤可笑, 但由此可以知道三書在宋以前是獨立的. 《三國志》最早的刻本-北宋咸平六年(公元一〇〇三)國子監刻本, <呉志>分上下兩帙, 前有刻<呉志>牒文. 後來紹煕的重刻本裏, 也保留著一頁咸平國子監刻<蜀志>的牒文. 可知咸平刻書時雖已合併爲《三國志》, 但還是三書分別發刻的.

by 소하 | 2009/12/18 11:03 | 삼국지(三國志) | 트랙백

노필《삼국지집해》<조운전> 역주2

노필《삼국지집해》<조운전> 역주1


〔一〕《雲別傳》曰:【《趙雲別傳》, <隋唐志>不著錄.】
《조운별전》에서 말하길: 【《조운별전》은 수서와 당서의 예문지에 기록된 것이 없다.】


   雲身長八尺, 姿顔雄偉, 爲本郡所擧, 將義從吏․兵/詣公孫瓚. 時袁紹稱冀州牧, 瓚深憂/州人之從紹也, 善雲來附,【元本「善」作「喜」.】嘲雲曰: 「聞貴州人皆願[從]【주석注釋:「《通鑒》胡注: 願下當有「從」字.」袁氏, 君何獨迴心, 迷而能反乎?」】 雲答曰: 「天下洶洶, 未知孰是, 民有倒縣之厄, 鄙․州論議, 從仁政所在, 不爲忽袁公/私明將軍也.」遂與瓚征討.

   조운의 신장은 8척(192cm)이며 용모[姿顔]가 웅장[雄偉]하였다. 본래 군(郡)에서 천거되었는데(191년), 의를 따르는 관리와 병사들을 이끌고[將] 공손찬에게 갔다. 당시에 원소는 기주목을 자칭하였는데, 공손찬은 기주[州]의 사람들이 원소를 따르는 것을 매우 근심하였다.
(공손찬은) 조운이 귀부한 것을 기뻐하였으나【원元나라의 판본에는 「선善」자가 「희喜」자로 되어 있다.】, 냉소[嘲]를 날리며 말하였다. 「그대가 속한 주(기주冀州)의 사람들은 모두 원씨(원소)를 [따르기를從]【주석注釋:「《통감》호삼성 주석에 당연히 「종從」자가 있어야만 한다.」】 바란다고 들었소. 어째서 그대만 홀로 마음을 돌려 원소를 배반[反]하려는 것이오?」
조운이 대답하였다. 「천하는 흉흉하여 누가 옳은지 알 수가 없사온데, 현縣의 백성들은 매우 위태롭습니다. 비鄙(작은마을)와 주州에서 논의하여 어진 정사[政]를 따르기로 하였는데, 원공(원소)을 경시[忽]하고, 명장군(공손찬)을 편애[私]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하여 (조운은) 공손찬과 함께 (여러 곳을) 정벌하였다.


   時先主亦依託瓚, 每接納雲, 雲得深自結託. 雲以兄喪, 辭瓚暫歸, 先主知其不反, 捉手而別, 雲辭曰:「終不背德也.」先主就袁紹, 雲見於鄴. 先主與雲同床眠臥, 密遣雲合募得數百人, 皆稱劉左將軍部曲, 紹不能知. 遂隨先主至荊州. 【何焯曰:「<本傳>先主爲平原相時, 雲已隨從主騎. 《別傳》謂『就袁紹․雲見於鄴』, 則在建安五年後, 此違反, 不可信也.」】

   선주도 이 당시에 공손찬에게 의탁하였는데 항상 조운과 친분을 나누어[接納], 조운은 의탁[結託]하려는 (마음이) 깊어질[深自] 수 있었다. 조운의 형이 상喪을 당하자, 공손찬을 떠나서 잠시 고향으로 돌아가니, 선주는 그가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고서 손을 잡으며 이별했다. 조운이 선주에게 말했다 「항상[終] (당신의) 덕德을 잊지 않겠습니다.」
선주가 원소에게 의탁하였을 때(200년), 조운은 선주를 업에서 만났다. 선주는 조운과 함께 같은 침상에서 잤으며, 은밀히 조운을 보내어 병사 수백명을 모집하고, 모두 유좌장군의 병사[部曲]라고 하였으나, 원소는 (그 사실을) 알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조운은 선주를 따라서 형주로 갔다.(207년)
【하작이 말하길: 「(조운의) <본전>에서 선주가 평원의 상이었을 당시에(191년) 조운은 이미 중요한 기병이 되어서 따랐다고 하였다. 《별전》에서『원소와 조운이 업에서 만났다.』는 것은 건안 오년(200년) 이후의 일인데, 이것은 서로 위배되므로 믿을 수가 없다.」】
【주석注釋: 유비는 191년에 전해와 함께 원소를 막은 이후에 평원의 상이 되었다. 진수의 <조운전>에서는 이 당시에 조운이 유비를 따랐다고 하였고,《조운별전》에서는 200년에 의탁하였다고 하였다. 두 자료의 년수가 서로 9년이 차이나는데, 《조운별전》의 신빙성을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 어떤 사람은 진수가 《조운별전》의 내용을 이용하지 않은 것에 의문을 품었는데(아래 노필의 주석에 보인다), 이것은 진수가 다른 자료와 서로 비교하여 신뢰하기 어려운 자료라고 판단했거나, 아니면 진수 이후에 어떤 사람이 떠도는 말들을 채록하여 편찬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운별전》의 작자는 누군지 모르므로 더 이상 고찰하기는 어렵다. 】


요약: 조운별전은 신뢰하기 어려운 자료다.

by 소하 | 2009/12/14 16:38 | 삼국지(三國志) | 트랙백 | 핑백(1) | 덧글(2)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