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일부 완역된 중국의 25사는 중화서국의 서적을 저본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해제에 해당하는 “출판설명”은 빠져 있습니다. 서문이나 발문 같은 것은 더더욱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비록 다른 서적에서 번역한 것이 보이지만, 중간에 빠뜨리고 번역하지 않은 부분도(표시도 없음) 보입니다. 이것들은 독자들에게 고적의 내력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여 서적의 이해도를 높여줍니다. 분량도 적당하여 체례와 서지사항을 알 수 있는 좋은 글이라고 생각됩니다.
중화서국《삼국지》출판설명
일
위魏 문제文帝 황초黄初(서기 220-226) 원년에서 진晋 무제武帝 태강太康(서기 280-289) 원년에 이르기까지는, 중국 역사상 위魏․촉蜀․오呉 삼국이 정립했던 시기다. 이 60년의 역사 사실을 기재한 비교적 완전한 사서는, 서진西晋 초기에 진수陳壽가 저작한 《삼국지三國志》가 있다.
당나라 이전에는 본래 《사기史記》․《한서漢書》․《동관기東觀記》를 “삼사三史”라고 하였는데, 후대에 《동관기》[1](현재 존재하는 《동관한기東觀漢記》는 후대 사람의 집일서이다.)가 실전되자, 《사기》․《한서》․《후한서後漢書》를 “삼사”라고 하였으며, 후세 사람들은 진수陳壽의 사학과 문필을 높이 평가하여 《삼국지》를 추가하여 “사사四史”라고 불렀다. 《삼국지》는 《사기》와 《한서》의 (사학을) 계승하여 지은 것으로 《후한서》 이전에 성립되었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는 통사체이고, 반고班固의 《한서》는 단대사체인데, 《삼국지》는 삼국을 세 서적으로 나누었으니 -《위서魏書》30권, 《촉서蜀書》15권, 《오서呉書》20권으로 - 모두 65권으로, 단대사에 있어서 별도의 한 격식을 창조하였다.
진수가 책을 완성한 연대를 비록 확정할 수는 없으나, 그가 진 혜제惠帝 원강元康 7년(서기 297년)에 죽은 것은 알고 있다. 이때는 위나라 최후의 군주인 진류왕陳留王이 아직 죽지 않았을 때이다. 당시에 위나라와 오나라 양국에는 이미 역사서가 있었는데, 관에서 수찬한 왕침王沈《위서魏書》와 위소韋昭의 《오서呉書》, 개인이 편찬한 것으로는 어환魚豢의《위략魏略》이 있었으니, 이 세 종류의 서적은 진수가 근거했던 기본적인 사료들이었다. 오직 촉나라의 역사(자료)만 없었는데 필시 진수가 직접 (역사 자료를) 채집하였을 것이다. 진수는 촉나라 사람이며, 또한 사학가 초주譙周의 제자로 촉나라가 아직 멸망하지 않았을 때 촉나라의 사실에 주의를 기울였으므로, 그가 채집한 것은 비록 위나라에 미치지 못하고, 오나라의 관찬사료처럼 풍부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결국에는 《촉서》를 완성하여 마쳤으니,《위서》와 《오서》 두 서적과 나란히 배열할 수 있었다. 다만 세 나라의 사료가 근원이 같지 않았기 때문에, 세 서적의 완성도에는 차이가 있었다. 《오서》는 본래 예전 위소의 저술에 의지하여 다시 진수의 손을 거쳐 완성되니 그 완성도가 한층 더해졌다. 《촉서》는 원본(의지할 사료)이 없었으므로 비교적 간략하다. 《위서》의 많은 부분은 위나라 역사의 옛 문장에 의거함이 많았는데, 왕침과 어환의 원서에 기재된 것으로(일례로 조상의 죄악에 관한 것), 진수는 진나라의 신하로서 감히 원문을 고치지 않았으니, 이것은 사실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평가를) 면하기는 어렵다. 총괄하여 말한다면 진수가 본 사료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세가지 서적의 내용은 모두 충실하지 못하다. 《삼국지》에는 <지志>와 <표表>가 없는 것은 바로 사료가 부족했기 때문이며, 이후에 배송지裴松之가 주석을 달면서 이러한 결점을 보완하려고 하였다.
《위서》․《촉서》․《오서》 세 서적은 본래 각기 (독립된) 서적으로 전수되었는데, 북송 시기에 이르러 판을 새길 적에 처음으로 하나로 합쳐서 《삼국지》라고 바꾸어 불렸다. 《구당서》<경적지>에서 《위서》는 정사류에 넣었으며, 《촉서》와 《오서》는 편년류에 넣었는데, 이러한 분류법은 물론 잘못된 것으로 웃을 일이지만, 세 서적은 일찍이 송나라 이전에는 서로 독립되어 세상에 널리 퍼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지》의 최초 판각본은 북송 함평 6년(1003년)의 국자감 판각본으로 <오지呉志>가 상하 두 질로 나누어져 있으며, 앞에는 <오지呉志>의 첩문을 새겨 놓았다. 이후 소희紹煕 시기에 재차 판각한 판본 안에도 함평 연간에 국자감에서 판각한 <촉지蜀志>의 첩문 1쪽을 남겨두었다. 함평 연간에 책을 판각할 때 이미 병합되어 《삼국지》라 하였지만, 세 서적이 아직까지 별도로 나뉘어서 발행되고 판각되었음을 알 수 있다.
[1]《동관기東觀記(동관한기東觀漢記)》: 후한 시대에 후한의 역사를 서술한 서적으로,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정부에서 주관하여 편찬한 기전체 관찬정사. 동관은 서적을 보관하던 곳이었다. 정부에서 주관한 서적답게 곡필이 많아서 식견있는 사람들은 소리높여 비판하였다. 현대로 본다면 "하상주단대공정"과 비슷한 경우다.
中華書局《三國志》出版說明
一
魏文帝黄初元年到晋武帝太康元年(公元二二〇-二八○), 是中國歴史上魏․蜀․呉三國鼎立的時期. 記載這六十年歴史發展的比較完整的史書, 是西晋初年陳壽著的這部《三國志》.
唐代以前, 本以《史記》․《漢書》․《東觀記》爲三史, 後來《東觀記》失傳(現存的《東觀漢記》是後人輯佚書), 就稱《史記》․《漢書》․《後漢書》爲三史, 後人推重陳壽的史學和文筆, 於是又加上《三國志》, 稱爲四史. 《三國志》繼承《史記》․《漢書》而作, 成書遠在《後漢書》以前. 司馬遷的《史記》是通史體, 班固的《漢書》是斷代史體, 《三國志》把三國分成三書-《魏書》三十巻, 《蜀書》十五巻, 《呉書》二十巻, 共六十五巻, 在斷代史中別創一格.
陳壽成書的年代雖然不能確定, 但知他死在晉惠帝元康七年(公元二九七), 這時候魏的最後一個君主陳留王尚未死去. 當時魏․呉兩國已先有史, 官修的有王沈《魏書》․韋昭《呉書》, 私撰的有魚豢《魏略》, 這三種書是陳壽所根據的基本材料. 惟蜀國無史, 必須由陳壽直接採集. 陳壽是蜀人, 又是史學家譙周的弟子, 在蜀未亡時即注意蜀事, 他所採集雖然不及魏,呉官史那様豐富, 也終於完成《蜀書》, 與《魏》․《呉》兩書並列. 但正因爲三國史料的來源不同,所以三書的成就也有差異. 《呉書》因爲韋昭的舊著本來相當好, 再經陳壽整比, 更加完美. 《蜀書》没有藍本, 因而比較簡略. 《魏書》多是根據魏史舊文, 而王․魚原書的記載, 有些是秉承司馬懿意旨誣加的(例如關於曹爽的罪惡), 陳壽是晉臣, 不敢擅改原文, 這就難免有些失實的地方. 總括的説, 因爲陳壽見到的史料有限, 所似三書的内容都還不够■充實. 《三國志》没有<志>․<表>, 正是爲了材料不足; 後來裴松之所以要給它作注, 也是要補救這個缺陷.
《魏》․《蜀》․《呉》三書本是各自爲書, 到了北宋雕板, 始合爲一種, 改稱《三國志》. 《舊唐書》<經籍志>以《魏書》入正史類, 《蜀書》․《呉書》入編年類, 這種分類法, 固然錯誤可笑, 但由此可以知道三書在宋以前是獨立的. 《三國志》最早的刻本-北宋咸平六年(公元一〇〇三)國子監刻本, <呉志>分上下兩帙, 前有刻<呉志>牒文. 後來紹煕的重刻本裏, 也保留著一頁咸平國子監刻<蜀志>的牒文. 可知咸平刻書時雖已合併爲《三國志》, 但還是三書分別發刻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