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고수 전쟁 - 살수와 수나라 병력.

612년 수 양제(隋煬帝)의 2차 고수전쟁 시기에는 큰 전투가 3번 있었다. 첫번째가 수군 총관인 내호아가 바다로 나아가 평양에서 벌어진 전투다. 두번째는 양제의 본대로 요동성을 공략한다. 세번째는 이 전쟁의 마지막 전투인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薩水 전투"다.

양제는 요동성 함락과 수군의 평양 진격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자, 9개군 30만명을 동원하여 우문술 장군에게 총지휘를 맡기고 평양으로 나아가게 한다. 이 소식을 접한 고구려는 당황하지 않고, 우문술의 진격을 서서히 늦추면서 방어 태세를 갖춘다. 우문술의 부대가 압록강을 건너자, 상대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던 을지문덕은 더욱더 시간을 지연시키는 전술로 맞선다. 수隋군은 평양으로 진격할 당시에 병사들에게 100일치 식량과 무기를 휴대하게 하였는데, 너무 무거워 병사들은 몰래 버리면서 진격했다. 이미 압록강에 이르러서는 군량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수隋군은 살수薩水(지금의 청천강)(1)를 건너 평양성에 다달았으나, 우문술은 군량 부족으로 평양성을 상대로 공성전을 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마침 을지문덕이 항복을 청해오자, 수군은 살수를 건너 회군한다. 을지문덕은 회군하는 수군의 후미를 공격하여, 우문술 군대의 대부분을 궤멸시켜 버린다.

우문술이 평양으로 진격할 당시의 병력은 모두 9개 군軍으로 30만명이었다고 한다.(2) 하지만 이것은 《수서. 예의지》에 기록된 군대 편제 기록과 상충된다. <예의지>에서 1군軍은 모두 2만명이었다고 한다.(3) 그렇다면 9개군軍은 모두 18만명이 되어야 한다.


고수 전쟁시 수나라의 병력  http://tinis74.egloos.com/1314397


위글에서 보듯이 양제가 고구려를 정벌할 당시의 병력은 24군軍과 어영6군軍으로 편제상으로는 총 30군軍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어영 6군軍의 병력은 어느 정도였는지 기록이 없다. 단지 어영군의 기존 편제를 개편해 6군軍으로 만들었다는 기록뿐이다.(4)

24군軍은 고구려 정벌시에 새로 징집된 병력이고, 어영 6군軍은 곧 수나라의 상비군(정예병력)을 말하는 것이다. 수나라의 상비군은 60-70만에 달했는데, 이 군대가 모두 먼 원정길에 나설 수는 없었다. 국내를 지키는 병사들을 모두 동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수 문제의 1차 고구려 전쟁은 이 상비군 중 30만을 동원하여 이루어진 전쟁이다. 양제는 이 상비군만으로 고구려를 정복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 그래서 새로히 24군軍 48만명을 징집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어영 6군의 병력은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1차 전쟁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즉 모두 30만으로 6으로 나누어 본다면 어영 1군軍은 5만명이 되는 셈이다.

다시 살수전투로 돌아가보면 9군軍은 이 어영군과 새로 편성한 24군軍을 같이 동원한 것이 아닐까?(2) 요동성과 수군의 실패로 양제는 새로운 타개책이 필요했을 것이다. 새로운 돌파구가 없다면 고구려 원정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철수해야만 한다. 이러한 중요성을 가진 전략에서 평양 직격을 맡기는 병사들을 모두 새로 징집된 병사들로만 구성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내가 추정하기에는 어영군 4개군軍(20만)과 24군의 5개군軍(10만)이 동원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매우 작위적인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우문술 부대가 모두 24군의 소속의 군대였다는 것은 더욱 믿기 어렵다. 9개군이 모두 24군의 소속이었다는 전쟁사 관련 서적들의 설명은 사실 근거가 매우 부족하다.

내 추정대로라면 양제의 총병력은 48만(24군)+30만(어영 6군)= 78만이 되는 셈이다. 총병력이 113만이었다는 것은 비전투원까지 포함했던 것일까? 

 

덧글.
북조수당의 군사 제도는 "부병제府兵制"로, 역사적으로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남조가 멸망한 것은 군사 개혁을 이루지 못해 북조에 정복당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 중요성을 인식해서인지 "부병제"를 연구한 연구서와 논문들은 근대부터 지금까지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다. 다른 사람의 연구 내용을 그대로 배껴 재배열한 가짜를 제외하더라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청 노경원의 <당절충부고>를 필두로 나진옥, 진인각, 곡제광, 당장유등의 역사가들이 열심히 연구해 준 덕분인지, "군제사"나 "전쟁사"의 타이틀을 붙힌 서적들의 이 부분을 보면 비교적 가지런하다. 헌데 고수 전쟁시 수나라 군대의 편제와 병력에 대해서는 이걸 연구해 준 역사가가 없었기 때문인지, 군바리(?)들 나름대로 고증을 한 모양인데 그들의 고증능력은 사실 애교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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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有淸川江 古稱薩水, 卽高勾麗乙攴文德, 敗隋兵百萬之地.
청천강이 있다. 예전에는 살수라 칭하였는데, 곧 고구려의 을지문덕이 수군 백만을 패퇴시킨 곳이다.
《고려사. 지리지》

(2)初,渡遼九軍三十萬五千人,及還至遼東城,唯二千七百人.
이전에 요수를 건넌 9군은 30만 5천이었는데, 요동성으로 돌아온 (군대는) 오직 2천7백 명뿐이었다.
《수서. 우문술전》

(3)24군의 1군 병력은 2만명인데, 이미 앞글에서 썼던 것처럼 <예의지>의 기록은 생략된 문장이다. 여사면 선생의 《수당사》나 《중국전술사》(김옥국 해방군출판사 2003)에서도 모두 이와 같은 의견이다. 
http://gall.dcinside.com/list.php?id=history&no=203663&page=1&search_pos=-196803&k_type=1000&keyword=%EC%86%8C%ED%95%98

(4)御營內合十二衛. 三臺. 五省. 九寺,發隷內. 外. 前. 後. 左. 右六軍.
어영 내부의 12위 3대 5성 9시 합하여 내. 외. 전. 후. 좌. 우 육군軍으로 만들었다.
《자치통감 수기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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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하 | 2008/01/29 15:17 | 한국사(韓國史) | 트랙백 | 핑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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