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7월 16일
성복전투1 - 전투이전.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전쟁사만큼 사료 의존도가 높은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많은 유물이 쏟아지더라도 기록이 없다면, 전쟁과 전투의 흐름이 어떠했는가를 복원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임진왜란 수전에서 충무공의 《난중일기》와 <장계>를 빼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불과 400백년 전도 그러한데, 천년이나 2천년을 훌쩍 뛰어넘는 사건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다행히 기록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신의 축복이라고 생각해야 할 지경이다. 단 한줄의 기록에라도 목이 마른다.
성복전투 이전.
성복전투가 일어난 시기가 기원전 632년이므로 지금으로부터 약 2600년의 사건이다. 서주가 무너지고 동주시대가 시작되면서, 주나라는 이미 그 힘을 잃어버린다. 전목 선생의 의견을 따르면 동주가 시작되면서 봉건제도는 무너졌다고 한다. 이 힘의 공백지대를 채운 것은 봉건 제후국들인데, 특히 두각을 나타냈던 제후국 군주들을 역사에서는 "춘추오패"라고 부른다. 춘추시대는 확실히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는 역사적 대전환점이 되었다. 패자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처음 패자가 된 군주는 제나라 환공이었다. 그를 보좌했던 관중과 함께 춘추시대에 가장 유명한 인물이기도 하다. 제환공의 힘은 기원전 651년 규구의 회맹에서 정점에 이르고, 관중이 죽은 이후에는 점차 쇠미해졌으며 최후는 비참했다. 생전에 천하를 질타했던 그가 죽자 제나라에서는 내전이 일어나는데, 그의 시신은 2달 동안 방치되어 구더기가 들끊었다고 한다.
제환공 사후에 두각을 나타낸 제후국은 오랑캐라 여겼던 남쪽의 초나라였다. 이때부터 중국은 동서의 항쟁에서 남북의(장강) 항쟁이라는 또 하나의 역사적 전환점을 맞게 된다. 북쪽의 제후국 중에 이 초나라의 진출을 저지할 수 있는 나라는 없었다. 성복전투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북쪽의 대표자인 진나라와 남쪽의 대표자인 초나라의 정면대결이었다.
《춘추좌전》《사기》《상서》.
성복전투를 기록한 역사서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춘추좌전》이다. 이것은 《춘추》에 주석의 형태로 저술된 것으로 "전"이라고 불리우며, 소위 13경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분량으로만 본다면 13경 주에서 규모가 가장 방대하다. 《좌전》은 글자수는 약 18만자인데, 그 다음의 《예기》는 10만자에 약간 못 미친다. 《춘추》는 약 1만6천여자다.
《좌전》의 가치를 단순하게 분량의 다소로만 볼 수는 없다. 앞으로는 《상서》와 《춘추》, 뒤로는 《전국책》과 《사기》로 연결되면서, 중국 역사서술의 큰 전환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후대에 사전문학의 시조로 숭상되면서, 역사서술과 문학저술의 대종大宗이 되었다.
《사기》는 많은 부분을 《좌전》에 의지하고 있는데, <진세가>에 기록된 성복전투도 대부분《좌전》을 이용하여 재편집한 것이다. 사마천이 보충한 부분도 있는데, 주나라 양왕이 진문공을 후백에 봉하는 책명에서《상서. 문후지명》을 인용하고 있다. 이것은 태사공이 진문후(780-746)와 진문공(636-628)을 혼동한 것인데, 고증가들에게는 잃어버린《고문상서》의 원형으로 인식되어, 상서학에서는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한 연구에 따르면 《사기》가《상서》를 인용한 것은 모두 400번이라고 한다. 현전《상서. 문후지명》과 <진세가>에 인용된 글은 자구가 약간 다른 것이 있다.
춘추좌전 (끝에 강조된 부분)
# by | 2008/07/16 19:38 | 13경(經)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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