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7월 17일
춘추필법春秋筆法.
본래 <문후지명>을 번역하고, 이어서 문자고석과《상서》에 대해서 쓰려고 했었다. 헌데 《사기》에 인용된 <문후지명>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좌전》으로 흘러 가더니, 진문공으로 이어지고 본론은 잃어버린체 다른 이야기만 하고 있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춘추좌전》에 대해서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진문공과 관련된 자료를 찾다가 부수적으로 걸려든 것이 있다. 양계초의《중국역사연구법》이다. "'사가의 신용은 땅에 떨어졌다.' 으음! 이거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구절인데..." 환독의 알흠다운 인용사례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춘추필법春秋筆法
《춘추》는 본래 《노춘추》(원사료)를 필삭(글을 깍다)하여 만든 것이다. 공자의 다른 저작인 《시경》은 3000편의 시에서 305편을 골라 편집한 것이고, 《서경》 또한 3000여편의 글 중에서 100편을 골라 편집한 것이다.《춘추》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면 된다.
다만 여기에는 독특한 "필법筆法"이라는 것이 있는데, "미언대의(미미한 말로 큰 뜻을 드러내다.)"하여 포폄(선악을 드러내다)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춘추》를 역사서에 분류하지 않고 경서에 갖다 놓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역사비평서"라는 것이다. 보기 좋으라고 경서에 갖다 놓고, 13경의 하나로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다.
속사비사屬辭比事
그렇다면 춘추필법이라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인가? 《예기禮記》를 보면 공자가 6경에 대해서 말하는 부분이 있는데, 여기에서 《춘추》를 언급하고 있다.
屬辭比事, 《春秋》敎也. 《春秋》之失, 亂. 屬辭比事, 而不亂, 則深於《春秋》者也.
(공자가 말하길) 속사屬辭하고 비사比事하는 것이 《춘추》의 가르침이다. 《춘추》의 결점은 어지러움이다. 속사하고 비사하는 것이 어지럽지 않다면, 《춘추》에 (조예가) 깊은 것이다.
속사屬辭: 말을 붙인다. 비사比事: 사건을 비교하다.
옛부터 바로 저 속사비사屬辭比事를 이용하면《춘추》의 대의, 즉 공자의 "미언대의"가 드러난다고 하여 수많은 연구가 진행되었다. 비사比事(사건을 비교한다)의 예를 한번 찾아보자. 두예의《춘추석례春秋釋例》 첫번째를 보면, 노나라 군주의 즉위기록을 분석하고 있다.
公即位例 공(노나라 군주)의 즉위에 관한 범례.
隠元年, 春王正月. 《傳》曰: 不書即位, 攝也. 은공 원년 봄 왕 정월.
桓元年, 春王正月, 公即位. 환공 원년 봄 왕 정월 공 즉위.
莊元年, 春王正月. 《傳》曰: 不稱即位, 文姜出故也.
閔元年, 春王正月. 《傳》曰: 不書即位, 亂故也.
僖元年, 春王正月. 《傳》曰: 不稱即位, 公出故也.
文元年, 春王正月, 公即位.
宣元年, 春王正月, 公即位.
成元年, 春王正月, 公即位.
襄元年, 春王正月, 公即位.
昭元年, 春王正月, 公即位.
定元年, 夏六月, 癸亥, 公之喪至自乾侯, 戊辰, 公即位.
哀元年, 春王正月. 公即位.
右公即位凡八위에 노나라 공의 즉위를 기록한 것은 모두 8번이다.
---《춘추석례春秋釋例》
노나라 12명의 군주들에 대해 "즉위했다"라고 기록한 것이 8번이고, 기록하지 않은 것이 모두 4번이다. 기록하지 않은 4번이 문제가 되는 것인데, 여기에 공자의 "미언대의"가 있으며 "포폄"의 뜻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비사比事(사건을 비교한다)라고 한다. 전傳은 좌씨전을 말하는 것인데, 여기에서 그 원인을 말하고 있다.
隠元年, 春王正月. 《傳》曰: 不書即位, 攝也.
은공 원년 봄 왕 정월. 즉위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은공이 섭정攝했기 때문이다.
莊元年, 春王正月. 《傳》曰: 不稱即位, 文姜出故也.
장공 원년 봄 왕 정월. 즉위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문강文姜이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閔元年, 春王正月. 《傳》曰: 不書即位, 亂故也.
즉위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노나라가) 어지러웠기 때문이다.
僖元年, 春王正月. 《傳》曰: 不稱即位, 公出故也.
즉위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공이 나가서 (즉위식을) 못했기 때문이다.
문강文姜: 장공의 어머니. 장공의 아버지는 어머니의 나라 제나라에서 피살되었다.
후대의 사가들이 춘추필법春秋筆法을 따랐다?
《좌전》은 순전히 《춘추》때문에 경이 된 것인데, 중국 역사서술의 수준을 최고조로 끌어올려 사전문학의 시초가 되었다. 공자가 필삭한 사료들을 모아서 "전"을 만들었으며, 역사사실을 전달하는데 주력하여 사건의 원인과 인과관계, 인물들의 미묘한 감정묘사 등 서술이 다채로우면서도 생동감이 있다. 복잡했던 전쟁묘사에도 매우 뛰어났는데, 작자의 서술 속으로 들어가면, 외국의 사신으로 가는 세객이 되기도 하고, 군막에 앉아 작전회의에도 참석하고, 돌격병이 되어 적진을 종횡하기도 한다.
진나라와 초나라의 성복전투도 《좌전》의 전쟁서술 중에서 으뜸으로 꼽히는 것 중 하나다. 전쟁의 원인에서부터 군사훈련, 나라를 다스리는 방략, 제후국들의 지리한 이합집산, 신하들의 현명함과 우매함, 인물들의 복잡한 감정묘사, 치열한 전투 과정, 엄격한 전쟁의 결과, 제후국들의 눈치외교. 등을 뛰어난 구성력과 담담한 필치로 모두 3000자에 담아내어 한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 하다. 다른 전쟁을 서술한 것을 보면, 글의 구성이 달라져 지루하지도 않고, 서로 보완하여 연결되고 있다.*
고리타분한 경학가들이 《좌전》을 폄훼한 것이 없지는 않으나, 후대에 사가들이 역사를 서술할 때《춘추》의 필법을 따르지 않고,《좌전》을 따랐던 것은 당연하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남송의 정초가 잘 분석하고 있다.
自唐之後, 凡秉史筆者, 皆凖《春秋》, 專事褒貶. 夫《春秋》以約文見義, 若無傳釋, 則善惡難明.
史冊以詳文該事, 善惡已彰, 無待美刺. 讀蕭. 曹之行事, 豈不知其忠良? 見莽. 卓之所為, 豈不知其凶逆?
당나라 이후부터 대저 사필을 든 사람들은 모두 《춘추》를 표준으로 하여 포폄을 행한다.** 무릇 《춘추》는 짧은 문장으로서 의를 보이는데, 만약 전이나 해석이 없다면 선악을 밝힐 수가 없다.
사책은 자세한 문장으로서 사건을 갖추어, 선악이 이미 드러나니, (문장을) 잘라내어 아름다움을 드러낼 필요가 없다. 소하와 조참의 행사를 읽으면 그 충심과 선량함을 알지 못하겠는가? (아니면) 왕망과 동탁의 행동을 보면 그 흉악함과 역심을 모를 것인가?
---《통지通志 총서總序》
노나라 군주 즉위에서 든 예처럼 다른 기록(해석)이 없다면, 왜 즉위한 사실을 빼놓았는지 알 수 있겠는가? 중국의 역사서술은 《춘추》처럼 행간에서 포폄을 한다는 "춘추필법"을 따르지 않았다. 그보다 역사적 사실을 자세히 서술하고, 맨 마지막에 사가의 평을 집어넣는 《좌씨전》 의 서술법을 따랐다. 이러한 서술법은 《사기》와 《한서》에서 반석처럼 굳어져 이어졌고, 《삼국사기》나 《유사》, 《고려사》,《동국통감》등 우리나라의 역사 서적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 이를테면 단 한번만 서술하면 되는 훈련법이나 행군법, 기타 군례에 관한 것들을 적절히 분류하여 끼워놓고 있다. 끼워놓는 솜씨도 매우 탁월하여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 대표적인 것으로 구양수의《신오대사》와 주희의《통감강목》이 있다. 오대시기의 역사를 저술한 《구오대사》는 이미 실전되었는데, 지금 전하는 것은 영락대전에서 모은 것으로, 오히려 이것을 보는 것이 더 낫다. 《통감강목》? 구경도 못해 봤다. 사학적으로 아무 영향력도 없었으며, 별 가치도 없고, 아무도 보지 않는 3not이다.
*** 여담으로 정초는 허망한 말을 매우 싫어했는데, 우리가 자주 쓰는 "견강부회"라는 말은 이 <통지 총서문>에서 동중서(한나라 춘추공양학 대종. <춘추번로>의 저자)를 까대면서 말한 "견합부회"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양계초梁啟超의《중국역사연구법中國歷史研究法》
양계초梁啓超(1873-1929)는 청나라 말기에서 중화민국 초기까지 활동한 학자로 강유위의 제자다. 내가 읽어본 것은《신사학》과《고서의 진위와 그 년대》,《중국 근삼백년 학술사》의 <변위서><집실서> 정도다. 《중국역사연구법》은 일전에 대강 훑어본 적이 있는데, 초록불님의 글을 보고, 그 진위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눈으로 속독을 했기 때문인지 찾을 수가 없었다.
재야의 춘추필법 클릭.
이번에 진문공에 관한 자료를 찾다가, 관련사항이 있어 《중국역사연구법》를 다시 보게 되었다. 헌데 낯익은 구절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어짜피 환독들이 인용을 믿지는 않았지만, 확인해 보니 어처구니가 없다.
공자의 이러한 춘추필법에 대하여 서토의 석학 양계초梁啓超(1877-1930)는 그의 저서‘중국역사연구법(中國歷史硏究法)’에서 이렇게 비판하고 있다.
중국의 모든 역사는 중국의 목적을 위한 추초(짐승먹이 풀), 구축의 노릇을 할 뿐이다. 그 결과 반드시 억지로 중국을 증심으로 역사를 위조하여 사가의 신용이 땅에 떨어졌다. 이 악습은 공자의 수법에서 나와 2천년 동안 중국역사가 그 악습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빨간색은 환독들이 위조한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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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切史跡, 則以供吾目的之芻狗而已. 其結果必至強史就我, 而史家之信用乃墜地. 這惡習起自孔子, 而二千年之史, 無不播其毒.
한번 사적이 단절되면, 한편에서는 내 목적의 도구로써 이용되었을 뿐이다. 그 결과 자신만의 무리한 역사가 되었으며, 이로써 사가의 신용은 땅에 떨어졌다. 이러한 악습은 공자에게서 처음 발생하여, 2천년의 역사에서 그 독이 퍼지지 않음이 없었다.
--- 양계초梁啓超《중국역사연구법中國歷史研究法》

일단 출생년도와 사망년도부터가 틀리다. 물론 전하고자 하는 내용도 완전히 상반된다. 양계초 선생의 말은 옳은데, 다만 위에서 말한 것처럼 중국의 전통적인 사가들은 "춘추필법"에 회의를 품은 이가 더 많았으며, 직필하려고 노력하였다.
환독들아! 양계초 선생은 이런 말도 하셨단다. 너희 환독을 골라내 없애는 것이 학문의 첫걸음인 동시에 기념할 만한 업적이라고 말이다.
無論做哪門學問, 總須以別僞求真爲基本工作. 因爲所憑借的資料若屬虛僞, 則研究出來的結果當然也隨而虛僞, 研究的工作便算白費了.
中國舊學, 十有九是書本上學問, 而中國僞書又極多, 所以辨僞書爲整理舊學裏頭很重要的一件事.
어떤 학문을 막론하고, 거짓을 구별하고 진리를 탐구하는 것을 기본 작업으로 삼아야 한다. 만약 허위의 자료를 이용하게 된다면 연구결과도 당연히 허위를 따르게 되며, 연구 작업도 헛되게 된다.
중국의 옛 학문은 열에 아홉이, 서적을 근간으로 하는 학문이었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또한 위서가 극히 많았다. 그래서 서적을 변위하는 일이 옛 학문 속에서 정리가 된 것은 매우 중요한 일대 사건이었다.
---《중국 근삼백년 학술사》
이것은 중국 고대사에 대한 양계초 선생의 유머러스한 글.
中國文明與世界文明的進化原則剛剛相反。若相信神農. 黃帝許多著作,則殷墟甲骨,全屬僞造,不然. 就是中國文明, 特別的往後退化。
중국문명과 세계 문명의 진화 원칙은 강강하게 상반된다. 만약 신농과 황제에 대한 허다한 저작들을 믿는다면, 은허갑골은 모두 위조한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결국 중국문명만이 특별하게도 후기로 갈수록 퇴화된 것이다.
---《고서의 진위와 그 년대》
# by | 2008/07/17 23:03 | 13경(經) | 트랙백(2) | 핑백(1) | 덧글(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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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네들 학풍 때문에 그런가요?
주희는 이학의 집대성자라 더 말할 필요도 없겠죠. 그는 <좌전><사기><자치통감>을 크게 비판하면서 <통감강목>을 지었는데, 이것은 매우 가소로운 것이죠. 책을 지은 이후 바로 폐기된 3not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