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8월 07일
왕안석王安石 - 장주론莊周論과 한국사.
莊周論장주론 上篇상편.
世之論莊子者不一, 而學儒者曰:「莊子之書, 務詆孔子, 以信其邪說. 要焚其書, 廢其徒而後可, 其曲直固不足論也.」
세상에서 장자莊子를 논하는 사람들은 하나가 아닌데, 유학을 배우는 자들은:「장자의 책은 공자孔子를 비난하는 것에 힘쓰니, 그것은 사이한 말을 신봉하기 때문이며, 그 책들은 (모두) 모아서 불태우고, 그 무리들도 없애버리는 것이 옳은 것이며, 그 곡직曲直은 당연히 논할 필요도 없다.」고 하였다.
學儒者之言如此, 而好莊子之道者曰:「莊子之德, 不以萬物干其慮, 而能信其道者也. 彼非不知仁義也, 以爲仁義小而不足行己; 彼非不知禮樂也, 以爲禮樂薄而不足化天下.
유학을 배우는 자들의 말은 이와 같지만, 장자의 도道를 좋아하는 사람들은:「장자의 덕德은, 만물을 사용하지 아니하고(不以萬物干其慮 ??)*, 그 도道를 믿을 수 있는 것이다. 그가 인의仁義를 알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인의는 작은 것이라서 자신이 행할 가치가 없다고 여겼다; (또한) 그는 예악禮樂을 알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예악이 너무 엷어서 천하를 교화시킬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 不以萬物干其慮: 이 구절은 해석이 잘 안된다. ㅠ.ㅠ
故老子曰:『道失後德, 德失後仁, 仁失後義, 義失後禮.』* 是知莊子非不達於仁․義․禮․樂之意也, 彼以爲仁․義․禮․樂者道之末也, 故薄之云耳.」
그러므로 노자는『도道를 잃은 후에 덕德이 생기고, 덕德을 잃은 후에 인仁이 생기고, 인仁을 잃은 후에 의義가 생기고, 의義를 잃은 후에 예禮가 생긴다.』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장자가 인仁․의義․예禮․악樂의 의미를 통달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가 인․의․예․악을 도道의 말단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것을 가볍게 여긴 것이다.」
*《노자老子》38장: 故失道而後德, 失德而後仁, 失仁而後義, 失義而後禮.
夫儒者之言善也, 然未嘗求莊子之意也; 好莊子之言者固知讀莊子之書也, 然亦未嘗求莊子之意也. 昔先王之澤, 至莊子時竭矣, 天下之俗, 諛詐大作, 質朴幷散, 雖世之學士大夫, 未有知貴己賤物之道者也.
(사람들은) 대개 유자儒者들의 말을 좋아하고, 장자의 뜻은 구하려고 하지 않았다; 장자莊子의 말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당연히 장자의 책은 읽었지만, 이들 또한 장자의 뜻을 구하려고 하지 않았다. 옛날에 선왕先王의 은택은 장자의 시대(춘추전국 시대)에는 모두 사라지니, 천하의 풍속은 아첨하고 속이는 것이 크게 일어났으며, 소박하거나 질박한 것은 함께 흩어져, 비록 세상의 배움이 있는 사대부라 할지라도, 자신을 귀하게 하는 것은 알았으나, 비천한 것의 도를 아는 자는 없었다.
於是棄絶乎禮義之緖, 奪攘乎利害之際, 趨利而不以爲辱, 隕身而不以爲怨, 漸漬陷溺以, 至乎不可救己. 莊子病之, 思其說以, 矯天下之弊, 而歸之於正也.
그리하여 예의禮義의 여분마저 끊어지고 버려졌으며, 이익과 손해 사이에서 서로 빼앗고 다투면서,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수치라 여기지 않았다. 또한 자신을 망쳐도 원망하지 않았으니, 이것에 점점 빠져들고 스며들어서, 종내에는 자신을 구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장자는 이러한 병폐를 자신이 생각한 학설로 천하의 폐단을 교화시키고, 올바른 방향으로 돌아가려 한 것이다.
덧붙이는 글.
장자론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바꾸어도 좋을 듯 하다. 한국의 200년 역사를 대변하는 듯 하다.
옛날에 정조께서 승하하시니 선왕의 은택은 모두 사라지고, 아첨하고 속이는 소인배들이 크게 일어나, 군자들은 절해고도에 갇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소박하거나 질박한 것은 함께 흩어지고, 비록 세상의 배움이 있는 식자라 할지라도, 자신을 귀하게 하는 것은 알았으나, 비천한 것의 도를 아는 자는 없었다.
그리하여 예의는 그 여분마저 끊어졌으며, 이익과 손해 사이에서 서로 빼앗고 다투면서,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수치라 여기지 않았다. 또한 자신을 망쳐도 원망하지 않았으니, 이것에 점점 빠져들어서, 종내에는 자신을 구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정조와 실학자들은 이러한 병폐와 폐단을 교화시키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려 한 것이다.
왕안석(1021-1086)은 송나라 신종 시대 사람으로, 개혁가와 신법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또한 그의 문장력은 대단해서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기도 한다. 그의 개혁안을 들여다보면 상공업을 억제하고 농업을 중시하는 동양의 전통적 관념이 엿보인다.
하지만 당시에 사회 구성원의 대부분이 농민이었으니, 왕안석의 개혁정책이 농민을 중점으로 펼쳐진 것은 당연하다. 농민을 구제하여 나라의 기둥으로 삼고, 사회악인 독점과 부패의 폐단을 개혁하려고 했던 것이다. 혹 왕안석의 개혁이 시대착오적이라는 책이나 글이 있다면 그냥 내다버리는 것이 좋다.
대지주와 대상을 혁파하려 했으니, 보수파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친 것은 당연했다. 그의 최대 지원자는 개혁의지가 높았던 젊은 황제 신종(생:1048-1085 38세, 재:1067-1085)이었고, 최대의 방해자는 보수파의 우두머리 사마광(1019-1086)이었다.
신종은 이 처치 곤란한 노련한 정치가를 직접 맞상대하기보다는 문자의 감옥 속에 가둬버린다. 동양의 위대한 사서의 하나인《자치통감》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탄생했다.
신종의 죽음과 보수파의 끊임없는 방해 속에서 왕안석은 결국 권력의 중추에서 밀려났으며, 낙향하여 저술에 힘쓰다가, 자신의 개혁이 차례대로 폐지되는 것을 보면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다. 보수 꼴통들이 쓴 후대의 평가도 혹독하기만 했다.
# by | 2008/08/07 20:57 | 노자(老子) 도가(道家) | 트랙백 | 덧글(2)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