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6월 19일
백납본이십사사(百衲本二十四史) 전서(前序) - 장원제(張元濟)
백납본이십사사(百衲本二十四史) 전서(前序)
장원제(張元濟)
* “■ -”로 표시한 소제목과 단락의 구분은 임의로 첨가하고 나눈 것입니다. 양이 많아서 원문은 제외하고, 번역문만 포스팅 했습니다. 장원제 선생의 담담한 필치가 마음에 듭니다.
■ 들어가는 말
옛날에 사마온공(사마광)*이 말하기를: 「(나는) 어릴 적에 오직 고씨(고준)의 《소사》만을 얻어서 읽었다. 송나라(유송)부터 수나라까지의 정사(正史)와 《남사》․《북사》는 본 적이 없었으며, 어떤 것은 읽어도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 남북조의 《통감》을 편찬하니, 비로소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라고 하였다. 장실재(장학성)*가 또한 말하길: 「《통감》은 사절을 가장 소략한 것이며, 기사본말은 또한 《통감》의 강령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통감을) 사학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하여 단지 사찬이나 사초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학문을 하기 위해서는 사서를 읽지 않을 수 없으며, 더욱이 정사를 읽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 사마광: 송나라의 역사가. 《자치통감》을 편찬하였다.
* 장학성: 청나라의 역사가. 《문사통의》를 편찬하였다.
■ 역대 24사의 판각본에 대하여.
정사(正史)를 모아서 판각한 것 중에서 지금 현존하는 것은 급고각(汲古閣)의 『17사』, 남(南)․북감(北監)의 『21사』, 무영전(武英殿)의 『24사』가 있다.
『남감본(南監本)』*은 대부분 송․원의 옛 판본에서 나왔으며, 『급고각본(汲古閣本)』* 역시 판각할 때 「송판 정본에 의거하여 교정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구하기가 쉽지 않다. 『북감본(北監本)』*의 교감은 정밀하지 못하고, 틀리고 빠진 것이 많으며, 또한 함부로 고친 것이 얼마인지 모르는데, (이는) 옛 사람들의 오랜 정평이 있다. 현재 세상에서 가장 널리 통행되는 것은 『무영전본(武英殿本)』*과 같은 것이 없다.
수십 년 이래로 (이들 판본을) 중간한 것으로는 신회의 『진씨본』이 있으며, 또 금릉․회남․강소․절강․호북의 다섯 서국에서 『급고각본』을 (저본으로 삼아 여러 판본을) 섞어 넣어 합각한 판본이 있다. 활판본으로는 『도서집성국본(圖書集成局木)』이 있다. 석판 인쇄본으로는 『동문서국본(同文書局本)』․『죽통재본』․『오주동문서국본(五州同文書局本)』이 있다. 여러 판본이 앞뒤로 인쇄되어 더욱 널리 유행(流行)되었다.
* 남감본(南監本): 명나라 초기의 수도인 남경의 국자감에서 판각한 17사.
* 급고각본(汲古閣本): 명나라 시기의 장서가 모진이 개인적으로 판각한 17사.
* 북감본(北監本): 명나라 수도가 이전되어 북경의 국자감에서 판각한 17사. 남감본과 함께 호칭되어 "양감본"이라고도 불리운다. 남감본을 저본으로 삼았다.
* 무영전본(武英殿本): 청나라의 자금성 무영전에서 교정하여 판각한 24사. 북감본을 저본으로 삼았다.
■ 무영전본(武英殿本) 24사에 대하여.
오직『전본(무영전본武英殿本)』의 교정과 판각이 비록 세밀하고 정확하다고 하지만, 천록임랑(天祿琳琅)*의 진귀한 비본[秘], 내각대고(內閣大庫)의 잔본, 사부 서적으로 훌륭한 것이 많음에도 당시에 이를 모두 수집하지 못했다. 근근이 양한兩漢․삼국三國․진晉․수隋의 다섯 개의 사서만이 송․원의 옛 판각본에 의거했으며, 나머지는 오직 명나라의『양감본』에 의지할 뿐이었다.
* 천록임랑(天祿琳琅): 청나라 황실의 수장고.
사마천《사기》의 (주석서인) 《집해》와 《정의》는 많은 부분이 삭제되었으며, 《사고제요》*에서 수십 조목을 나열하여 『전본』에서 빠뜨린 것이라고 하였는데, 만약 『진택왕본(震澤王木)』*이 없었다면 함부로 산삭된 부분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어째서 증보하지 않았는가?
* 《사고제요》: 《사고전서》와 함께 편찬된 것으로 목록과 해제로 이루어져 있다. 모두 200권.
* 진택왕본(震澤王木): 진택왕 연철이 송나라의 황선부본을 복간한 것. 현재 《삼기삼가주》의 가장 오래된 판본이다.
낭야琅邪의 장환이 지은 《양한구주(兩漢舊注)》는 『전본』에서 탈루된 것이 몇 글자에서 수백 자에 달했다. 송나라 가우(嘉祐) 시기에 교정하여 간행했던 《칠사(七史)》*는 여러 신하들이 명을 받들었던 것으로, (여기에 참여했던) 유․범․증․왕*은 모두 박학다식한 선비였는데, 그들이 편의 말미에서 의심되는 부분에 소(疏)를 남긴 것은 지극히 신중한 것이었으나, 『전본』에서는 이것을 반도 남기질 않았다. 실제로 『전본』과 『순화淳化』․『경우景祐』*의 고본(古本), 『소흥紹興』․『미산眉山』*의 복각본(復刻本)의 천양지차였으나, 어째서 속히 찾아서 구하지 않았으며, 그것이 산실되도록 방임하였는가? 이것은 그 수집과 정리가 치밀하지 못한 점이다.
* 칠사(七史): 미산7사본(眉山七史本). 자세한 것은 여기를 참조. http://tinis74.egloos.com/975593
* 유․범․증․왕: 유서, 범증, 증공, 왕안국.
*『순화淳化』․『경우景祐』: 순화본 한서(994년에 판각). 경우본 한서(1034년에 판각).
* 『소흥』․『미산』: 즉 미산7사본(眉山七史本).
《후한서》의 <속지>(속한서의 팔지)는 범엽(范)의 《후한서》와 다른 것으로, 『전본』에서도 이것이 사마표司馬彪가 편찬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으며, 책머리에 또한 이르기를 유소(劉昭)의 <보지>라고 하면서도 합쳐서 120권으로 하였으며, 팔지(八志)를 본기와 열전 사이에 끼워 넣었다.
《삼국지》는 셋으로 나뉘어져 분권이 각기 다른데도 『전본』은 이를 합쳐서 65권으로 하였으며, 다시 《삼국지》의 권수를 여전히 각각의 시작과 끝으로 나누었다. 기타 대소 주제의 옛 모습을 모조리 폐기한 것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다. 이것은 수정의 불일치이다.
설씨薛氏의 《오대사五代史》는 《영락대전永樂大典》* 과 기타 각 서적에서 집록한 것인데, 원고에는 권수가 모두 갖추어져 있었으나, 판각하여 간행할 때에는 모두 삭제했다. 후인들이 그 유래를 고찰하려고 하여도, 추적할 방법이 없어서 고생한다.
또한 모든 사서에는 고증이 붙어 있으나, 유독 《명사明史》만이 없는데, 비록 건륭 42년에 고증해서 증보하라는 조서가 내려졌으나, 진상한 원고는 간행하여 반포되지 않았다. 또한 본기․지․표 116권은 의문스러운 것을 보류하여 수록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찬집의 소략함이다.
* 《영락대전》: 명나라 영락제의 명령으로 편찬된 중국 역사상 최대의 유서.
촉나라의 신하 관우의 열전은 진수로부터 나온 것이다. 갑자기 천 수백 년 후에 무리하게 붓을 휘둘러 충의라는 시호를 추존했다.
설거정의 사서(구오대사)에서 거란契丹을 질책하여 “융왕”․“융수”․“험윤”․“적구”․“위명”․“범궐”․“편발”․“견양” 등으로 부른 말은 어떤 혐오함이 있는지 이것을 모두 회피하여 수정하였다.
또한 명나라에서 수찬한 《원사》는 홍무洪武 2년()에 먼저 본기 37권, 지 52권, 표 6권, 전 63권, 목록 2권을 완성하고, 이듬해에 계속해서 본기 10권, 지 5권, 표 2권, 열전 36권을 완성했다. 정리하고 분류하여 덧붙여서 모두 210권을 완성했다. 첫 번째는 이선장李善長의 표(<진원사표>)에 보이고, 두 번째는 송렴宋濂의 기(<원사목록후기>)에 보인다. 『전본』에서는 전후에 완성된 책의 수량을 함께 하나로 이야기함으로써 이선장의 표는 이미 원문이 아니고, 송렴의 후기도 그대로 수록하지 않았다. 이것은 산서의 오류이다.
《남제서南濟書》의 <파주지>․<계양왕전>․<시흥왕전>은 사천에서 판각한 『대자본』*에는 궐문이 없었는데, 방문하여 구하고자 하였다면 어찌 증보하기 어려웠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고본이라 잘 보이지 않는다고만 하였다.
송 <효종본기>와 <전황열전>의 지정(至正) 초년의 간행본은 모두 잔일되지 않았다. 어쩐 일인지 한 편은 두 글자를 잘못 합하여 다른 페이지로 만들었고, 다른 한 편은 전체 페이지를 빠뜨려서 문장의 의미를 고증할 수 없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초판을 구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만 하였다.
《금사》 <예의지>와 <태종제자전>의 초인본은 두 페이지가 빠져 있었는데, 이윽고 내부장본內府藏本을 발견하여 교정 보완하였고, 후에 나온 판본은 하나는 다른 책에서 보충하였으나, 다른 하나는 여전히 공백으로 남겨져 있다.
그 외에 적게는 한두 구절, 많게는 수십 행에 이르기까지 글자가 탈루되고 문장이 빠진 것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여기에만 그치지 아니하고, 궐문 이외에도 중복된 페이지가 있는데, 예를 들면 《송사宋史》 권35권의 <효종기>, 《원사元史》 권53권의 <역지>가 그러하다. 이것은 당시에 교정하여 판각을 맡은 여러 신하들이 소홀했다는 허물을 피할 수가 없다.
* 『대자본』: 미산7사본.
■ 백납본 24사의 수집과 인쇄.
장사의 섭환빈(섭덕휘) 이부랑이 내게 말하기를 「청대에는 고증․훈고의 학문을 제창하였으나, 선본을 두루 수집하여 13경과 24사를 다시 판각하지 못한 것은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다.」라고 하였다. 나는 그 말에서 크게 느낀 바가 있어서, 의연히 옛 판본의 정사(正史)를 모아서 인쇄할 뜻을 품었다. 책방을 찾아다니거나, 장서가들에게 애걸하면서, 가까이는 양경을 오갔으며, 멀리는 외국으로 나아가 매번 보이는 대로 모두 촬영하여 보관하였다. 뒤에 좋은 것을 발견하면 앞의 것은 버렸으며, 이렇게 해가 지나고 달이 바뀌어 비교적 좋은 판본을 모두 모을 수 있었다.
비록 여전히 틀리고 빠진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나, 이 책은 초각을 중시하였으므로, 실로 『전본』의 소략하고 탈루된 점을 보완할 수 있을 것이다. 읽고 교정하기를 마친 후에 상무인서관에 넘겨서 촬영법을 이용하여 새로 인쇄하여 세상에 널리 유통되도록 하였다. 판식(版式)을 축소한 것은 소장하기에 편리하도록 하기 위함으로, (본래 서적의) 진면목을 잃지 않았으니, 근심할 필요는 없다. 혹 역사에[乙部-사부(史部)]에 뜻이 있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 참고: 백납본 24사가 채용한 판본. http://tinis74.egloos.com/362121
# by | 2009/06/19 23:09 | 중국사(中國史)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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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글 마지막을 보면 영인본인 것 같습니다...그럼 구두점이 찍혀 있지 않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