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09일
《수경주水經注》서언왕徐偃王
《후한서》에 의하면 유방劉芳은 《서주인지록徐州人地錄》 20권을 편찬했다고 한다. 또한 그의 자는 “성국成國”이 아니라 “문백文伯”이라고 되어 있다.
《수경주》와 같은 내용이 《태평어람太平御覽》과 《박물지博物志》에 《서언왕지徐偃王志》라는 이름으로 인용되어 있다. 원문에 있는 []표시는 이 두 서적에 근거하여 보충한 것이다. 교감을 해 보아도 의미가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문장이 조금 더 매끄러운 정도다.
----------------------------
《수경주水經注》8권 제수濟水조
劉成國《徐州地理志》徐偃王之異, 言:
유성국이《서주지리지》에서 서언왕의 특별함에 대해서 말하길:
徐君宮人[任](御覽)娠而生(御覽作「產」)卵, 以為不祥, 棄之于水濱. 孤獨母(御覽作「孤獨老母」博物志作「老獨母」)有犬, 名曰鵠倉(博物志作「蒼」). 獵于水側, 得[所](御覽)棄卵, 銜以來歸. 孤獨母(御覽作「獨母」)以為異, 覆煖之, 遂[烰](博物志)成兒(御覽作「弗乳而成人」). 生時[正](御覽 博物志)偃, 故以為名. 徐君宮中聞之, 乃更錄取[收養](御覽). 長而仁智, [因](御覽)襲君徐國. 後鵠倉(博物志作「蒼」)臨死, [更](御覽)生角而九尾, 寔(博物志作「實」)黃龍也. 偃王葬之徐[梁界](御覽)中, 今見有「狗壟」焉.
서군의 궁녀가 임신하여 알을 낳았는데, 상서롭지 못하게 여겨서 그것을 물가에 버렸다. 고독모에게는 개가 있었는데 이름이 “곡창”이었다. 물가 옆에 버려진 그 알을 얻어서 물고서 돌아왔다. 고독모는 특별하게 여기고 그것을 따뜻하게 덮어주었더니, 마침내 어린아이가 되었다. 태어날 때 넘어졌으므로 (언偃을) 이름으로 삼았다. 서군이 궁중에서 그것을 듣고서 상록을 주고 데려와 [길렀다]. 장성하자 어질고 지혜로웠는데, [이로 인하여] 서국의 임금을 계승하였다. 이후에 “곡창”이 죽자 뿔과 아홉 개의 꼬리가 나오니 황룡이었다. 언왕偃王이 서국 안에서 장사지냈는데, 지금도 그 「개무덤」을 볼 수 있다.
偃王治國(博物志作「偃王既主其國」), 仁義著聞, 欲舟行上國, 乃通溝陳․蔡之間. 得朱弓矢, 以[己](博物志)得天(博物志作「知」)瑞, 遂因名為號, 自稱「徐偃王」. 江․淮諸侯[皆](博物志)服(博物志作「伏」)從[, 伏從](博物志)者三十六國. 周王聞之, 遣使[乘駟, 一日](博物志)至楚, 令(博物志作「使」)伐之. 偃王愛民不鬪, 遂為楚敗, 北走[1]彭城武原縣東山下. 百姓[之](博物志)隨者[以](博物志)萬數, 因(博物志作「後遂」)名其山為徐山. 山上立石室廟(博物志此字無), 有神靈, 民人請(博物志作「祈」)禱焉(博物志此字無). [今皆見存.](博物志)
언왕偃王은 나라를 다스림에(박물지에는 “언왕이 그 나라의 주인이 되자”) 인의가 매우 높아서 배가 상국으로 다닐 수 있도록 진과 채 사이에 물길을 통하게 하였다. 붉은 활과 화살을 얻어서 하늘의 상서러움을 얻었다고 여기고 스스로 「서언왕徐偃王」이라고 하였다. 강수와 회수 사이의 제후들이 [모두] 복종하는 곳이 36개국이었다. 주왕이 그것을 듣고, [사마가 이끄는 수레로] 사신을 파견하여 [, 하루만에] 초나라에 도착하여 그곳을 정벌하게 하였다. 언왕偃王은 백성을 사랑하여 싸우지 못하니, 초나라에 패배하여 북쪽의 팽성 무원현 동쪽의 산 아래로 달아났다. [그를] 따르는 백성이 1만명이었으며, 이로 인하여 (이후에) 그 산을 서산이라고 하였다. 산위에 석실묘를 세웠는데, 신령함이 있어서 백성들이 빌며 청하였는데,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박물지)
# by | 2009/11/09 02:24 | 중국사(中國史) | 트랙백 | 덧글(1)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