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1월 05일
인문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
데카르트가 더 이상 의심할 수 없을 때까지 의심하라고 했던가? 또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가 말하는 생각이란 무엇인가? "오늘 저녁에 무얼 먹지? 된장찌개를 먹을까? 아니면 삼겹살을 먹을까?" 물론 이런 종류의 생각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답은 아주 간단하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시말해 의문을 품는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여 의문을 품은 것을 증명하여, 잘못된 것을 바로잡거나 새로운 학설이나 체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 학문이다. 학문을 배움으로 착각하는 이들이 상당히 많은 것 같다. 배움은 학문이 아니라 학문에 이르기 위한 과정이나 부분일 뿐이다. 생각한 바를 어떻게 증명하는가? 과학에서는 실험을 통해서, 인문학은 대부분 고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고증학은 크게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문자학, 훈고학, 음운학, 문법학등. 텍스트의 문자나 문장의 뜻을 올바르게 파악하는게 그 목적이다.
예) http://tinis74.egloos.com/362717
둘째, 교감학, 목록학, 문헌학, 판본학, 변위학, 집록학등. 텍스트의 원모습을 최대한 복원하는게 그 목적이다.
예) http://tinis74.egloos.com/372828
셋째, 문화사 및 전장제도사등. 텍스트가 속한 시대의 풍속과 문화등에 관한 지식은 텍스트의 이해도를 높여준다.
물론 이런 것은 물론이고, 균형적인 사고력과 이해력들도 갖추어야만 한다. 세번째의 예를 한가지 들어보면 한비자를 동양의 마키아벨리라는 글이 있었다. 누가 한 말인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마키아벨리가 필요하다면 인정을 두지 말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는 사상이 비슷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전국말기 사람인 한비자는 법가사상의 대명사로 불리우는데, 덕치나 예의를 부정하고 법 적용을 엄격하게 실행할 것을 주장했다. 이렇게 보면 비슷한 면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전국시대의 시대상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당시 법에 대한 관념을 살펴보면, 예와 덕으로 무장한 귀족들에게는 법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했다. 법이란 예와 덕을 모르는 무지몽매한 서민들에게나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당시 귀족들은 법의 적용을 받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대단히 굴욕적인 일이었다.(예는 아래 서인에게 이르지 않고, 형은 위의 대부에게 이르지 않는다.禮不下庶人, 刑不上大夫.《禮記. 曲禮上》. 이런 계급주의 때문에 나는 유가사상을 싫어한다.)
한비자는 귀족이건 서민이건 모두 똑같이 법의 적용을 받아야 할 것을 주장했고, 이것이 바로 그의 핵심적인 사상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의 사상은 예와 덕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예와 덕으로 방패막을 만들던 귀족들을 겨냥하고 있었던 것이다.(그가 귀족제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현대적인 의미로 말하면 "법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법집행에 귀천을 가리지 않겠다는 사상과 마키아벨리하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말이다. 텍스트의 글자나 문장을 그대로 해석한다고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큰 착각이다. 그뒤에 깔려있는 배경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반쪽짜리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고증없이 결론(의미, 생각)을 피력하는 것은 사상누각이나 다름없다. 인문학에서 고증은 과학에서 실험과 유사한 의미를 지니며, 황우석과 같이 실험을 조작하거나, 실험없는 혼자만의 독선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송나라 사람인 사마광 선생이 당시의 세태에 대해 한탄하던 글을 보자. 시대를 불문하고 저런 위선자들은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다.
新進後生, 未知臧否, 口傳耳剽,翕然成風. 至有讀《易》未識『卦』『爻』, 巳謂<十翼>非孔子之言. 讀《禮》未知篇數, 巳謂<周官>爲戰國之書. 讀《詩》未盡<周南><召南>, 巳謂毛․鄭爲章句之學. 讀《春秋》未知十二公, 巳謂《三傳》可束之髙閣. 循守注疏者, 謂之腐儒, 穿鑿臆說者, 謂之精義.
신진후생들은 옳고 그름을 알지 못하고, 구전(소문)만 듣고서 따라함이 하나의 풍조를 이루었다. 《주역》을 읽고도 『괘』와 『효』를 구분하지 못하면서 <십익>은 공자의 말이 아니라고 한다. 《예》를 읽고도 그 편수도 모르면서 <주관>은 전국시대에 지은 책이라 한다. 《시경》을 읽고도 <주남>과 <소남>도 모르면서 모시와 정현의 주는 장구지학이라고 한다. 《춘추》를 읽고도 12공도 모르면서,《삼전》은 모두 묶어서 고각에나 보존시켜야 할 책이라고 한다. 주소자(고증가)들을 썩은 유학자라 하고, 천착(이치에 맞지 않는 말)하고 억측하는 사람들을 정의라고 일컫는다.
---《온국문사마정공문집》권45 <논풍속차자>
온갖 본척 아는척을 다 하지만, 실상은 주워들은 풍문이나 지식. 자신의 생각만 가지고 입만 살아서 나불거린다는 말이다. 이런 자들은 책을 읽은 적이 없으므로, 무슨 말인지 모르는 고증은 썩은 것으로 몰아부치는 것이다. 자신의 무식을 가리기 위한 방편인 것이다. 고증은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고, 올바른 결론을 내리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하는 과정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자신의 무지함을 먼저 아는 것이 학문의 첫걸음이다.
# by | 2007/11/05 22:47 | 중국사(中國史) | 트랙백 | 덧글(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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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루로 옮길까 하다가 이제야 이사왔네요.
링크 신고합니다.
한비는 통속적 이미지에서 벗어나 원전에 의거한 재현이 이뤄진 반면, 마키아벨리는 통속적 이미지만 사용되고 있어서 딴지를 걸어 보았습니다(<군주론>은 유명하고, <로마사 논고> 또한 한국어로 번역된 바 있습니다). 또, 추상수준이 높은 문제들을 풍부하게 제기하는 저자들인데 그 지점도 짚지 못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죠. 세밀한 것도 매우 중대하지만, 그것이 직조해내는 큰 것 또한 중대하지 않나 싶군요.
제가 여기서 추상수준을 높힌다는 말로 의도한 것은 추상화를 해 나가다보면 뭐든 존재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게 된다는 사실과 같이, 어떤 사항들을 한데 묶을 경우 공통점을 지니게 되는 지점이 있다는 점이었고, 이것이 한비와 마키아벨리라는 두 사항 사이에서는 정치적인 것의 독자성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독자적인 정치체가 무엇이냐는 지점에서 두 사람은 굉장히 많이 다른 답을 합니다만 어쨌든 둘에게서 공통적인 추상적 문제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라는 지점을 지적하고자 한 것입니다. 한비/마키 등을 재현하는 문제 다음에 오는 문제에서, 즉 그들의 사유를 어떻게 활용할 것이냐, 재배열할 것이냐는 지점에서 그들이 다룬 문제를 추상화시켜 정리하는 상황이 오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지 않은가, 이 지점이 앞선 지적이 도달하게 되는 곳이 되겠고.
특히 고증학이 가지는 힘인 텍스트를 상대화시켜서 언제나 독자를 '위기'에 빠뜨리게 하는 그 힘 속에서, 위기를 종결시킬 필요가 있을 때 그런 작업이 필요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위기는 잘못 인용하고 있거나 잘못 해석하고 있어서 생기는 차원의 위기가 아니라, 복잡한 사상과 가치관의 전선 속에서 무엇을 선호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확실하지 않은 위기를 의미합니다. 이 전선이 어떤 것들이었는지를 그려보는 것이 제 경우에는 사상사 독해에서 중심으로 놓으려고 하는 것들이고 말이죠. 이 속에서 '동양의 마키아벨리'이런건 물론 정교한 표현이 되지 못하지만, 전선을 이루고 있는 문제를 추상화시켜 명확하게 짚어내는 것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증학이라는 주제를 넘어서는 리플이 된 것 같군요. 하지만 고증학도 결국 도구이니만큼 무효한 지적은 아닐 것으로 생각합니다. 쓸모 있는 지적이 되었길 바랍니다.
님이 지적한 “크고 높은 것(?)” 맞습니다. 사유란 스스로 객관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주관적이며 주관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저련님이 말씀하시는 높은 문제는 자신이나 특정집단의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 많고, 심지어 많은 부분에서 조작되고 위조되어 왔습니다. 고증학은 님이 고민하시는 문제 “어떤 것이 진실이냐”라는 질문에 자신의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생각에 맞기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분석하는 방법이며, 제일 먼저 선행되어야 할 일입니다.
약간의 관련만 있는 질문이자 요청쯤 되겠습니다. 요새 법가 문헌을 살피던 와중에 거의 보는 사람이 없는듯 한 <신자>를 봤는데, 혹시 제가 본 책 말고 참고할만한 것이 있는지, 그리고 내친 김에 더 잘 보려고 한국어로 옮기기도 했는데 심각한 오역은 없는지를 묻고 싶군요. 한문쪽은 막 까막눈 벗어난 정도인데다가, 일문이 태반이니 그리 자신은 없군요.
제목이 달려있는 일곱 편에 대한 번역입니다. http://cafe.naver.com/abcde1/576
일문 66개에 대한 번역입니다. http://cafe.naver.com/abcde1/5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