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1월 09일
《南齊書남제서》 결문의 미스테리1
내가 자칭 민족주의 사학한다면서 설치는 사람들의 글을 처음 본 것이 임승국의 《남제서》 결문(빠진 문장)에 관한 글이었다. 한 10여년 전 쯤인 것 같다. 그런데 아직도 이 의견이 이리저리 퍼지고 사실처럼 받아들여지니 한마디 하련다.
1981년 국회 공청회 기록을 보면,(추종자들은 이걸 청문회라고 한다. 청문회와 공청회도 구분 못하냐!) 그동안 그들이 주장하던 것이 여기 다 들어있었다. 헌데 아직도 이 범위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근 30년이 지났지만 변함이 없다.
국회 상임위원회 제11대 제108회(정기회) 제20차 (1981년11월27일) --- 임승국 발언.
그런데 묘한 것은 중국사가들이 남제서백제전을 보다가 자존심에 걸렸던 모양이에요. 어떤 자가 그랬는지 모르지만, 제가 추리컨대는 당나라 때의 사가의 짓으로 봅니다마는 남제서백제전 서두부분을 북! 뜯어냈어요. 백제의 영광이 하늘을 찌르고 중국의 위신은 땅에 떨어지니까 그게 배가 아팠던 모양입니다.
아마 문교부에서 갖고 계신 25사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마는 저도 25사가 두 질이 있는데 이 두질이 다 그래요. 그리고 그 공간에다 글자 네 개를 박아 놓았어요. 이것은 중국사가의 양심을 표한 것입니다. 뭐라고 했는지 아시겠습니까? "이하결문以下缺文"이라 “이 아래 글이 좀 빠졌쇠다.”하는 뜻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는 백제의 영광 동성왕의 영광은 이 "이하결문以下缺文"이라고 하는 공란 다음에 계속되는 글의 내용입니다. 사실 이 뜯겨 나간 자리에 있었던 백제의 영광 그야말로 기가 막혔을 거예요.
여러분들 빨리 남북통일 합시다. 그래서 옛날처럼 자유중국 중국대륙에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그런 날이 오면 나부터 먼저 중국땅에 가겠어요. 이 "이하결문以下缺文"의 공란속에 들어 있던 글을 찾으러 가겠습니다. 중국땅에 가면 찾을 가망있어요. 나는 중국말 곧잘 합니다. 거기서 중학교 4학년까지 다녔으니까요. 저기 송지영 교수께서 계신데 아마 중국말 썩 잘 하실 줄 압니다.
우리 모두 총동원해서 중국에 가서 이를 찾아옵시다. 이것도 국사 바로 잡는 작업의 하나입니다.

이 글을 보니 내가 봤던 글은 훨씬 이전에 쓰여졌던 것인가 보다. 자신이 어느 교수 집에 갔다가 《남제서》를 보고 자칭 민족주의 사학의 길로 들어섰다는 내용이었으니까. 하긴 그것도 다 거짓말인지도 모른다. 《남제서》를 약점 삼아 자기가 무슨 큰 애국이라도 하려는 듯 보이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별 시덥잖은 걸 약점 삼아 애국 애족 민족을 외치지만, 속을 들여다 보면 빈 깡통뿐이다. 사기꾼들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어쨌든 쓸데없는 소리는 이쯤하고, 이제 《남제서》에 대해서 말해보겠다.
《남제서》는 소자현(489-537년)이 편찬한 것으로 제나라(479-502년) 고제 소도성의 손자다. 중국의 정사 중 유일하게 종실 출신이 편찬한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본래 60권이었으나 당나라 때 <서록> 1권이 사라져 현재는 59권만 남아 있다.
1. 남제서 동이전(고구려 백제전)에 결문(빠진 글)이 생긴 시기.
중국에서는 수당오대(581-960) 시기에 불경과 경서들을 제일 먼저 판각(인쇄)되었다. 정사를 처음 판각하기 시작한 것은 송나라(960년)로 들어온 이후부터다. 물론 전사사(사기 한서 후한서 삼국지)들이 제일 먼저 판각되었고, 송 제 양 진 북위 제 주서들은 소위 7사라 불리우며, 한꺼번에 판각되었다. 비록 그 판본들은 없지만 시대가 가깝기 때문에, 그 정황을 고찰하는 것이 불가능하진 않다.
嘉祐中, 以《宋》ㆍ《齊》ㆍ《梁》ㆍ《陳》ㆍ《魏》ㆍ《北齊》ㆍ《周書》舛繆亡缺, 始命館職讎校. 曾鞏等以秘閣所藏多誤, 不足憑以是正, 請詔天下藏書之家, 悉上異本. 久之, 始集. 治平中, 鞏校定《南齊》ㆍ《梁》ㆍ《陳》三書上之, 劉恕等上《後魏書》, 王安國上《周書》. 政和中, 始皆畢, 頒之學官, 民間傳者尙少. 未幾, 遭靖康丙午之亂, 中原淪陷, 此書幾亡.
가우 년간에(《인대고사》에 의하면 1061년에 교정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송서》ㆍ《남제서》ㆍ《양서》ㆍ《진서》ㆍ《후위서(북위)》ㆍ《북제서》ㆍ《주서》가 오류와 결락이 있어 관직에 명을 내려 교수(교감)하고 교정하도록 하였다. 증공 등이 비각에 소장되어 있는 것은 오류가 많아, 이것에 의거하여 교정하기 어렵다고 [황제에게] 보고하여 청하기를 천하의 장서가들에게 이본을 모두 바치게 하였다. 얼마 후 수집이 완료되었다.
치평(1063-67년)중에 증공이《남제서》ㆍ《양서》ㆍ《진서》삼서를 교정하여 바치고, 유서 등이 《후위서》를 바치고, 왕안국이 《주서》를 바쳤다.
정화(1100-25년)중에 모두 마치어 학관에 나누어 주었고, 민간에 전하는 것은 많지 않았다.(이 때에 판각했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7사의 최초 판각본이다.)
얼마 후 정강 병오의 난을 만나(1126년), 중원이 함락되자, 이 책들은 거의 다 망실되었다.(정강의변; 금나라가 개봉을 함락하고 북송이 멸망한 사건을 말한다.)
--- 송 조공무의《군재독서지》송서조.
이 7사의 최초 판각본은 민족주의 사학자 님들께서 동족으로 만드려고 애쓰시는 금나라(만주족)의 손에 의해 모두 망실된 것이다. 또한 《남제서》의 결문이 생기게 된 것도 이들 판본과 그 저본(필사본)들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자세한 것은 뒤에 설명.)
紹興十四年(1144), 井憲孟爲四川漕, 始檄諸州學官, 求當日所頒本. 時四川五十餘州, 皆不被兵, 書頗有在者, 然往往亡缺不全, 收合補綴, 獨少《後魏書》十許卷, 最後得<宇文季蒙家本>, 偶有所少者, 於是七史遂全, 因命『眉山刊行』焉.
(이때부터는 남송시대의 일이다.) 소흥 십사년(1144년), 정헌맹이 사천조가 되어, 여러 주의 학관에 격문을 보내 예전에 반포한 판본을 구하였다. 당시 사천 50여주는 모두 병란의 입지 않았으므로 서적이 존재하는 곳이 있었지만, 왕왕 망실되고 결락이 있어 온전하지 못했다. 거두어 합하고 보철하니, 오직《후위서》 10권만이 없었다. 최후에 <우문계몽가본>을 얻었는데, 약간 빠진 부분이 있었다. 이리하여 칠사를 갖추어 [다시 간행하니] 이름하여『미산간행』(미산은 현 이름이다.)이라 하였다.
--- 상동.
이것이 소위 『촉각칠사본』으로 불리우는 판본이다. 현재 전해지는 7사의 판본은 모두 이『촉각칠사본』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다. 《남제서》 에 동이전만 문장이 빠진 것이 아니다. 증공이 교정할 때도 이미 결락이 있었다. "왕왕 망실되고 결락이 있어 온전하지 못했다."라는 글을 보면, 금나라의 개봉 함락과 파괴로 인해 또 다시 결락이 생기게 된 것이다. <고구려전>과 <백제전>의 결문도 이 시기에 생긴 것이다. 북송의 칠사 판각본에는 결문이 없었다는 사실은 《인대고사》와 《책부원귀》를 보면 알 수 있다.
청 건륭4년(1739년)의 무영전본武英殿本 《남제서》 .
<고구려전> 마지막 부분과 <백제전>의 앞부분이 없다. 첫번째 이미지의 마지막 줄 『建武三年』건무삼년(496년) 이후로 글이 없는데, 이것과 이어지는 문장이 《책부원귀》에 있다.


按《元龜》九百六十八:「明帝建武三年,高麗王․樂浪公遣使貢獻。」<明帝紀>不載,當亦為<高麗傳>缺頁中佚文。
생각건대《책부원귀》968권에:「명제 건무삼년(496년)에 고려왕․낙랑공이 사신을 파견하여 공물을 바쳤다.」[남제서] <명제기>에 이것이 없으니, 마땅히 <고려전>에서 결락된 페이지의 실문이다.
- 중화서국 《남제서》교감기.
景德二年九月,命刑部侍郎資政殿學士王欽若․右司諫知制誥楊億修《歷代君臣事迹》。...중략...凡九年,至大中祥符六年成一千卷上之。總三十一部,部有總序;一千一百四門,門有小類;外《目錄》․《音義》各十卷。上覽久之,賜名《冊府元龜》。
경덕 이년(1005년) 구월에 형부시랑자정전학사 왕흠약과 우사간지제고 양억에게 명하여《역대군신사적》을 수찬하게 하였다. ...중략... 모두 9년이 걸려 대중상부 육년(1013년)에 1천권을 완성하여 바쳤다. 총 31부로 부에는 총서가 있다;1104문이 있고, 문에는 소류가 있다 ;그외 《목록》․《음의》가 각기 10권이 있다. 황제께서 그것을 얼마간 보시고는 《책부원귀》라는 이름을 내리시었다.
송 정구《인대고사(영락대전 집본)》권2 수찬조.
《책부원귀》는 정사의 내용을 편집한 것인데, 완성된 시기가 1013년이다. 7사를 판각하기 위해 교정을 시작한 시기가 1061년이다. 당시 비각에 보존되었던 《남제서》의 <고구려전>과 <백제전>에는 결문이 없었음이 분명한 것이다. 아래와 같은 임승국의 말은 혼자만의 망상임을 알 수 있다.
『"이하결문以下缺文"이라 "이 아래 글이 좀 빠졌쇠다."하는 뜻입니다. 제가 추리컨대는 당나라 때의 사가의 짓으로 봅니다마는 남제서백제전 서두부분을 북! 뜯어냈어요. 백제의 영광이 하늘을 찌르고 중국의 위신은 땅에 떨어지니까 그게 배가 아팠던 모양입니다. 저도 두 질이 있는데 이 두질이 다 그래요. 』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잃어버린 전적을 다시 구하여 인쇄한 사람들이 임승국이 증오해 마지않는 바로 중국 사람들이었다. 고전은 편찬자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서 전수되어 온 것이다. 그러한 감회를 느끼지 못한다면, 고전을 볼 자격이나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섣부른 추측과 얕은 소견은 견강부회(자기 혼자만의 생각)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南齊書남제서》 결문의 미스테리2
# by | 2007/11/09 15:36 | 고증학(考證學) | 트랙백 | 핑백(2)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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